제목 : 동기회 탐방(31회) 등록일 : 2005-05-23    조회: 872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계성의 전통과 자부심을 꼭 지켜내야”

80 넘은 지금도 세 달에 한번씩 동기회 모임

“지하철 타고 교대역에서 내려서 강남쪽으로 한 백 미터 오면
클 태(泰) 바를 정(正), ‘태정’있어요. 그리로 와요. 근데 내가 좀
바빠서 약속시간보다 한 20분 늦게 50분까지 갈게요. 이거 미안
해서 어쩌나.”전화로 말씀하시는 품새만으로도 31회 서울회장
서복섭(徐福燮) 선배께서는 너무나 자상하실 듯하다.

하여튼 31회 동문의 역사와 근황을 취재하는 것이 목적인 우리
는 대구에서 고속철을 타고 그렇게 서울로 가서 31회 대선배님들
을 만나뵈었다. 먼저 뵌 분은 31회 총회장 김수태(金壽泰) 선배님
이시다.(계성 기별 동기회 중 총회장이 대구 아닌 서울에 거주하
는 기가 31회뿐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달마다 모였고 참가 인원
도 많았는데 이젠 나이도 나이인만큼 많아봐야 7∼8명 모여요.
요즘은 세 달마다 모이는데 오늘은 총동창회 회보에서 취재온다
고 해서 나랑 서복섭 동문이 나왔어.”

그런데 김선배님께서 총동창회 회보를 아직 보신 적이 없다고
하신다. 어허, 이런 변이 있나! 필자는 부랴부랴 주소를 수첩에 받
아적고 백배사죄드린 후 지난호인 30호를 보여드리면서 오늘 주
고받는 대화가 지난호의 30회 동문탐방과 같은 형식으로 동창회
보에 게재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배님께서는“내 얘긴
듣기만 하고 흘려. 내가 뭐 한 일이 있어야지.”하고 겸양을 보이
신다.

(조금 후 도착하신 서복섭 선배님께서“이 친구는 제일투자금
융 사장까지 한 금융계 거두이고 우리 31회 총회장인데도 늘 이렇
게 겸양하시다네.”하고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계성학교 졸업하고도 60년이 넘었어.”선배님께서 아득한 세
월을 회고하신다. “일제말에 고모부가 대구에 사셔서 거창에서
계성학교로 진학을 했어. 목탄차타고 네 시간 걸려 대구에 왔지.
그때도 신명학교 학생들이 운동시합 같은 것 벌어지면 계성 응원
했어. 계성 신명 결혼도 많이 했어.”

(당시엔 계성학교 운동장이 지금의 제2교회 자리였다고 하신다. 들어보니 지금과는 지리적 환
경이 아주 다르다. 그 무렵에도 동산병원은 계성학교 맞은편에
있었는데 그 좌우에 서문시장과 신명학교가 있었다. 서문시장이
지금과는 달리 동문동과 섬유회관 일대였고, 계성학교 운동장 역
시 지금과는 달리 신명과 계성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계
성학교 재학생이던 70년대 초에는 계성과 신명이 한 강당에 모여
서 수양회도 하고 했는데 그 무렵에도 그랬느냐고 여쭙자 고개를
가로 저으신다. “그렇지만 계성은 최고였지. 미션학교라 서구문
물이 일찍 들어와 일제 식민지시대인 그 무렵에 벌써 계성학교는
화장실이 수세식이었지. 아담스관이 한강 이남 최초의 2층 건물
이라고 전라도 사람들까지 도시락 싸들고 구경오던 시절에 화장
실이 수세식이었으니 어땠겠나.

학교 건물 안에는 스팀이 나왔고, 구두를 신고 교실에서 생활을 했
어. 교사들도 최고였지. 역사 가르친 정 선생은 수업시간에 일본
욕해가면서 수업했어. 일제시대에 친일파 비슷한 공립학교 교사
안 되고 사립학교인 계성으로 온 사람들이라 최우수 교사들이었
어. 그 당시에 벌써 학교 안 50계단 우측에 교사 사택까지 있었으
니! (지금은 없어졌으나 말씀을 들어보니 교사 사택이 현재의 음
악관 자리에 건재했다.)”

그런즉 달성공원 안의 지금 연못자리에 있던 신사참배를 거부
하다가 계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곤욕을 치렀다는 말씀은 당
연한 귀결이었다. “육군의 날이면 역전 앞에서 군인들에 이어 학
생들도 사열을 받았는데 그 연습과정에서 많이도 두들겨 맞았지.
일본인 교사가 3∼4명 있었고, 일본군 대위 출신의 한국인 교련
선생에게 주로 당했지.”이즈음에 서복섭 서울회장님이 들어오
신다. “아이구, 너무 바빠서 늦었네. 미안하이. 근데 좋은 일 하다
늦었으니 양해하시게.”명함을 보니 정말 바쁘신 분이다. 여든
넘으신 분이 앞뒤로 빼곡하게 직함이 기록된 명함을 가지고 계신
다“지금도 아픈 사람 치료해주다가 왔으니 선한 일하다 늦은 것
아닌가. 허허.”120명 입학에 99명 졸업했고, 현재 32명이 생존
해 계신다는 31회 선배님들 중 두 번째로 만나뵙는 분이시다. 김
수태 선배님께서“서복섭, 강옥근이 우리 31회 동문회 살렸어.”
하고 말씀하신 그 두 분 중의 한분이시다. “어허, 총회장이 서울
회장보고 그렇게 말해도 되나.

31회 살린 건 강옥근과 김수태야.”서선배님께서는 그렇게 말
씀하신다. “6.25 이전인 1947년에 동기회를 창립했고(초대회장
서복섭), 1975년 이후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동기회를 주최
했는데 판문점, 속초, 문경새재, 전라도 등등 동기회 차원에서 버
스를 맞추어 부부동반으로 안 가 본 곳이 없어. 그러다가 제일투자
금융 사장에서 정년한 이 친구(김수태 선배)가 대전의 신용금고회
사 사장을 7년 동안 맡게 된 이후로는 줄곧 대전에서 동기회를 했
어. 이 친구가 경비도 다 부담했어. 이만하면 이 친구가 얼마나
동기회에 기여했는지 아시겠지?”서선배께서 말씀하시자 김
선배께서“에이, 뭔 말씀을 그리 하시나.”하시며 또 다시 겸양해
하신다.

서선배께서“우리 동기엔 음악가 김만복, 화가 김창락, 적십자
병원 이규동, 금융계 김수태가 사회적으로 이름높지.”하시자 김선
배께서“난 빼고! 대한민국에 합기도를 처음 도입하고 지금도 전
국총재인 서복섭이가 얼마나 유명한데!”하신다.
젊을 때에 대구시 교육위원도 역임하셨다면서 (필자가 계성 후
배이자 대구시 교육위원 후배라고 더욱 환대하시는) 서선배께서
는 그 바람에 결혼식 주례를 많이 섰다고 회고하신다. 그런데 주례
사 하는 게 습관처럼 되다 보니 6.25 전시 중 서문교회에서 열린
모교 졸업식 때 총동창회장 대신 부회장으로 축사를 하면서“졸업
생 여러분 결혼을 축하합니다.”

하여 만장한 사람들을 폭소에 터뜨린 적도 있다고 하신다. 또 재
학시 하늘에 비행기가 뜨면 종을 치게 되어(공습 대피) 수업 시작
을 나발을 불어 알리게 되었는데 그 담당이 서선배이셨다. 그 바람
에 지각생들이 교문 근처에서 서선배의 교내 진입을 가로막고 같
이 등교할 것을 강요하여 곤욕을 면하지 못했다고도 회고하신다.
“일제 식민지 시대 아니면 벌어 질 수 없는 에피소드가 계성학교
에서 일어났던 게지.”

지면 부족으로 다 적을 재주가 없다. 하지만 꼭 적어야 할 대목
이 있다. 회견이 끝나고 다른 곳으로 우리가 이동하려 하자 서복
섭 선배님께서 직접 자가운전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신다. “계
성의 전통과 동문끼리의 인정은 누구도 흉내 못 내지. 그리고 말
이지, 내가 아직 나이도 얼마 안 되었는데 운전 한다고 힘든다 할
수 있나!”

남기진 부회장(51회)께서“원로 선배님께서 직접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다녀서 영광이기도 하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런데 운전
솜씨는 청년보다도 우수하십니다.”할 때 필자가“에이, 아직 나
이도 얼마 안 되었는데!”하여 차안에서 파안대소를 하였다. 이런
일이 계성학교 말고 우리나라 어디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일일까!

글·정만진(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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